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르요스 1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45년에 [[코펜하겐]]에서 태어났으며, 본명은 빌헬름이었고, 아버지가 아직 추정상속인이자 후계자였기 때문에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. 이후 [[덴마크 해군]]에서 복무하다가 1863년에 전 왕 [[오톤]]을 쫓아낸 그리스 국회에 의해 17살에 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.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약 8개월 뒤 아버지가 정식으로 덴마크 왕이 되었다. 즉 아버지보다 먼저 왕이 된 것이다. 그리고 이런 구도는 형 [[프레데리크 8세]]와 조카 [[호콘 7세]]로 이어진다. 그 전 해 오톤 왕이 쫓겨나고 새 국왕을 뽑는 국민 투표가 있었을 때, [[대영제국]]의 [[빅토리아 여왕]]의 차남인 [[알프레트(작센코부르크고타)|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]][* 이후 1893년에 [[작센코부르크고타]] 공작이 된다.]가 95%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.[* 참고로 24만 1202표 가운데 공화국을 원한다는 표는 93표, 빌헬름 본인은 6표, 프랑스 황제 [[나폴레옹 3세]]는 2표, 전 국왕인 오토의 복위는 1표를 얻었다.] 하지만 열강 출신 왕자가 다른 나라 왕위에 오르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국왕 후보에서 배제되었고, 그리스와 열강들이 서로 조율하여 빌헬름이 선택되었다. [[영국]]은 당시 [[에드워드 7세|왕태자]]의 처남[* [[에드워드 7세]]의 아내인 [[덴마크의 알렉산드라|알렉산드라]]는 빌헬름(요르요스 1세)의 바로 위 누나이다.]이기도 한 요르요스의 즉위 선물로 당시 영국령이던 [[코르푸]] 섬을 포함한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양도해주었다. 처음에는 나이가 어려 숙부 율리우스 왕자나 빌헬름 스폰네크 백작의 조언을 받았지만,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이들을 덴마크로 돌려보낸다. 애초에 진짜 [[그리스인]]도 아니었고 당연히 [[그리스어]]도 몰랐다. 모어는 [[덴마크어]], 제2언어는 [[영어]]였다. 이외에도 [[독일어]]나 [[프랑스어]]를 할 정도로 그리스와 인연이 없었다. 하지만 즉위 후 곧바로 [[그리스 교회]]로 개종하고 빠르게 그리스어를 익혔으며, 재임 초기에 덴마크 섭정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이후 그리스 정국을 안정화시키면서 인기가 높아졌다. 또한 [[고대 그리스]]와 [[동로마 제국]] 시절에 대한 자부심과 향수를 간직하고 있던 [[그리스인]]의 요구에 부응하여,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덕분에 요르요스 1세의 재임 후반기에는 재임 초기보다 그리스의 영토가 2배 이상 넓어졌다.[* 즉위 당시 47,000㎢ → 1913년 108,610㎢.] 크레타 섬을 탈환하려다가 실패하면서 한동안 귄위가 실추되기도 했지만, 이후로 [[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]]와 힘을 합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. 50년간 재위하면서 그리스 역대 국왕들 중에 가장 오래 재위하였고, 아울러 [[1896 아테네 올림픽]]을 개회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.[* 그의 친손자인 [[필립 마운트배튼]]은 60년 뒤 [[1956 멜버른 올림픽]]에서 국왕 [[엘리자베스 2세]]를 대리하여 개최 선언을 했다.] [[파일: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.jpg]] [[에드워드 7세]]의 장례식에서. 뒷줄 왼쪽부터 [[노르웨이 국왕]] [[호콘 7세]], [[불가리아 왕국|불가리아]] [[차르]] [[페르디난트 1세(불가리아)|페르디난트 1세]], [[포르투갈 왕국|포르투갈]] 국왕 [[마누엘 2세]], [[독일 제국]] [[카이저|황제]] [[빌헬름 2세]], '''요르요스 1세 본인''', [[벨기에인의 왕]] [[알베르 1세]]다. 앞줄은 [[스페인 국왕]] [[알폰소 13세]], [[영국 국왕]] [[조지 5세]](아들 [[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]]의 사돈 [[조지 6세]]의 아버지), [[덴마크 국왕]] [[프레데리크 8세]](친형). 그러나 1913년 즉위 5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리스가 새로 얻은 [[테살로니키]]를 방문했을 때 알렉산드로스 시나스(1870 ~ 1913)라는 이가 쏜 총에 맞아 [[암살]]당했다. 범인 시나스는 반군주파인 사회주의 조직원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횡설수설했고 알콜 중독이라는 의사 진단이 있었다. 그래도 경찰이 잡아다가 고문을 하자 그는 경찰들을 비웃었고 5월 6일 스스로 목을 매어 [[자살]]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